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강 방어선 전투 (문단 편집) == 한국군의 [[한강]] 도하 == 3일간의 혈전끝에 부대 체계가 사라진 한국 육군은 말 그대로 알아서 살아남아 한강을 도하해야 했다.[* 그래도 대부분의 병력은 중대 단위로 도하할 수 있었다. 사실 중대 단위 이상으로 병력이 모이지 않았다면 살아서 강을 건너기 어려웠겠지만.] 이들은 지하 [[공산주의]] 폭력조직과 시내 진입한 북한 육군 특공대, 반국가 범죄자와 대한민국을 배신한 일부 [[보도연맹]]원[* 보도연맹 대다수는 공무원들의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적당히 이름적힌 사람들이고, 실제로는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.] 등에게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서 한강을 도하해야 했다. 아래는 도하 장소 목록이다. * 이산포, 행주 - 둘 다 육군 제1보병사단과 제5사단 15연대를 위한 도하장. * 마포 - 서울시 내 최대의 나루터로 고기잡이, [[소금]], [[젓갈]]용 배에서 큰 [[조운선]]까지 수백척의 배가 있었음. 한강대교 폭발직후부터 피난민과 육군 [[병력]]이 운집했다. 이 부근에서 [[공산주의]] 치안대원이라든지 대한민국을 배신한 보도연맹원들이 약 10명씩 짝지어 피난민을 위협하다가 보통 [[중대(군대)|중대]]단위로 후퇴한 한국군에 의해 즉결 처형당함. * 이촌동 - 당시엔 엄청난 모래사장으로 한강대교 폭발 후에 한강에 도착할 병력을 고려하여 [[공병]] 도하용 단정 16척을 준비함 * [[한강대교]] - 북한 육군 전차가 1시에 서울에 진입함에도 불구하고 1시간 반이나 폭파를 지연하여 위의 16연대 1대대같은 미아리에서 일찍 후퇴한 부대들이 건널 수 있게 되었으나… 자세한 내용은 [[한강 인도교 폭파]] 참조. * [[한강철교]] - 경인선 상행선은 폭파시간의 차이로 인해 불발했고 그 결과 제7보병사단장이던 육군[[준장]] [[유재흥]] 장군을 포함하여 군민 수천명과 [[지프차]]부터 [[트럭]], 심지어 [[열차]] 수대가 한강을 도하할 수 있었다. * 서빙고나루 - [[버스]]까지 실어나를수 있는 배가 있을 정도로 수용능력이 엄청나고 한강 다리에 근접한 데다가 육본이라든지 수도경비사령부 주둔지에서 매우 가까워 한강대교 폭발을 본 시민들과 병력이 모였다. * 뚝섬 - 늦게 후퇴한 부대들은 시내에 있는 몇 대의 북한 전차들을 보고 [[숭례문]]-[[서울역]]-한강대교 코스가 아닌 [[흥인지문]]-왕십리-뚝섬 코스로 후퇴하였고 서빙고나루의 엄청난 인파에 아연실색한 일부 군인과 시민들은 상류방향으로 가서 미군사고문단(KMAG)과 함께 도하, 후퇴했다. * [[광진교]]•광나루 - 주로 포천-[[의정부시]] 라인에서 후퇴한 부대에 해당. 5, 16, 3, 9연대등과 [[육군사관학교]] [[사관생도]]들이 이쪽을 이용. 이곳은 28일 밤까지도 점령이 안되어 28일 정오 북한군이 서빙고, 마포 등지를 점령하자 미아리 방어선 최후의 전투 때 퇴각한 김병휘 대령 예하 육군 2사단 25연대 등 군인들과 늦게 피난간 시민들이 많이 이용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